
나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우리 민족의 유산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이라고 하는 직지는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우리가 소유해야 하고 우리 땅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딱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인류 유산에 대한 일종의 수탁자인 셈이다. 굳이 따진다면 공공신탁 또는 인류공동유산의 관리자 정도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문화재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냐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다. 문화재 반환운동은 과거에 그것을 제국주의 국가가 배타적으로 전유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문화재가 우리의 법적 소유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국가 폭력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기억도 민족주의와 조우하면 재산처럼 국유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문화재는 인류가 함께 누리는 유산이고, 역사적 폭력은 ‘인류가 함께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상처’이다. 하지만, 특정 공동체가 대상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순간, 그것이 가져야 할 본래 의미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겪은 구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폭력이다. 그리고 나치와 그 협력자들의 범죄이다. 그러나 바로 그 구체성이 곧바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이스라엘 국가의 배타적 정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인간을 절멸의 대상으로 만들 때, 인류 전체가 무엇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인류 전체에 대한 대한 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인류 모두가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인류에 대한 국가의 폭력의 피해자성을 피해의 기억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국가나 정치공동체가 전유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면역을 생산한다. 첫째, 내부에서는 도덕적 자본이 되어 현재의 가해를 정당화한다. 둘째, 경계효과를 통한 타자화이다. 외부에서는 그 폭력의 경계를 좁게 그어, 특정 가해자와 특정 피해자 사이의 문제로 국한시킨다. 그러면 그 울타리 바깥에 있는 제3자는 ‘내 문제가 아니다’라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실, 특정 공동체의 구체적 경험을 지워버리면, 보편으로 승화되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은폐될 우려도 있다. 하지만, 피해의 구체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독점적 도덕 자본으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피해의 구체성이 가해자를 향한 책임의 추궁으로 기능한다면, 정당한 언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의 가해를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도덕적 자본이 된다.
또한, 피해자성의 전유를 비판하는 입장 자체가 이미 가해자 측의 수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반론이다. 홀로코스트의 보편화는 독일 우파가, 위안부 문제의 보편화는 일본 우파가 먼저 꺼내든 카드이다. 우리가 피해자성 독점화를 비판하는 순간 그 의도와 상관없이 가해자의 면책 논리와 공명할 수 있다는 우려도 경청할 만하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는 말로 해소되지 않는다. 실천을 통해서만 반박될 수 있다. 즉, 자기 가해에 대한 성찰 없이 타자의 피해자성을 비판하는 것은 가해자의 면책 논리에 불과하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문제도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 문제에도 분명한 가해자가 있고, 그 책임은 흐려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의미는 한일 간 과거사 문제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국가와 제국이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인류 전체가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서 피해자성을 배타적으로 전유하게 되면,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국가 폭력에는 둔감해지게 된다. 위안부 문제를 상대화하자거나 그 피해자성을 희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진정으로 우리 것으로 삼으려면, 먼저 우리의 가해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4·3, 광주학살은 물론이고 국외에서는 베트남전도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에 대통령이 베트남에 간다는데, 거기에서 베트남전 당시의 국가 폭력에 대해 한마디라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세 명의 이른바 진보 성향 대통령이 20년에 걸쳐 서로의 언어를 계승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며 노무현이 썼던 ‘마음의 빚’을 이어받았다. 그때마다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베트남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우리는 국가 폭력의 문제를 좀 더 보편적 인류에 대한 공격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에 대통령이 베트남전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도 국제인도법 준수와 인간의 존엄성은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 가치”라고 단언했던 그의 언급을 보면서,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20여 년 동안 이어진 성찰의 궤적이 현재 정부에서 단절된 것 같아 아쉽다. 미래만 이야기하고 과거를 묻지 않는다. 일본처럼 말이다.
우리가 당한 아픔이 정말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가 가한 아픔과 타인의 아픔 또한 우리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